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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후, 구산성당에서 마련한 조촐한 저녁식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후, 구산성당에서 마련한 조촐한 저녁식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후, 구산성당에서 마련한 조촐한 저녁식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구산성당 마지막 미사후, 구산성당에서 마련한 조촐한 저녁식사(2016.06.05.주일 오후 5시)
마지막 미사
2016. 6. 6. 김 학렬(약망) 신부.
어제(2016. 6. 5. 17시) 추억이 서린 고향(구산) 성당에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정겨운 분들이 많이 참석하여 성당 밖까지 가득 메웠고, 변기영 몬시뇰께서 본당설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억지킴이’(Memory Guard)를 이루어가자 하시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국천주교회창립 기억지킴이’와 결부시켜 구산성당의 '기억지킴이'를 역설하셨다.(구산성지의 신앙은 천진암성지의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나의 세례문서는 백동(혜화동) 성당에 있고, 첫영성체는 신당동 성당 공소(구산)에서 하였고, 견진성사와 소신학교 입학문서는 천호동 성당에 있고, 수원교구가 분리된 이후 나의 교적은 경안(광주) 성당으로 이전되어, 천호동보다 더 먼 50리 길의 경안성당으로 다니다가, 신장 성당 출신으로 신품성사를 받았다. 혼배성사와 병자성사는 자격이 없어서 받지 못하였으나, 이렇게 모든 성사를 “떠돌이 공소”에서 살며, 매번 바뀌는 본당에서 받았다. 고향 공소(본당)는 이제까지 변함이 없건만, 본당은 도시화에 밀려 저절로 분가가 되면서 10번이나 바뀌어 갔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구산의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누리골(종로5가 효제초등학교 인근)에 집회장소를 마련하여 신부님들을 모셨고, 신앙의 자유를 맞아 선조들은 명동성당 터닦기 공사에 주력하였고, 다음에는 약현성당(문밖 성당) 소속이었다가, 백동(혜화동), 신당동, 천호동 성당의 신축 때마다 노력 동원(부역) 역할을 다하였다. 교구가 분리되면서도 이 노력은 계속 이어져, 경안성당에 이어 신장본당의 분리 신축 때도 주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서울 중심부에서 시골 변두리로, 새 본당이 분리될 때마다 소속이 바뀌는 동안, 구산공소는 그대로 공소였다. 옮겨간 소속 본당이 누리골, 마장안, 명동, 약현, 백동, 신당동, 천호동, 경안, 신장, 구산 성당으로 10 곳이었다. 1979년 6월 29일에 변기영 신부에 의하여 구산 본당이 출범하게 되어, 그 때부터는 ‘떠돌이 공소’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1830년경부터 이선생(훈장)에 의하여 시작된 구산 공소는 유 파치피코 신부에게 보례를 받기(1834) 시작하여, 마장안에서 모방신부님을 모셨고(1836), 구산 공소가 설립되어(1836년 5월) 모방신부와 앵베르 주교와 후대 선교사들이 방문하는 공소겸 언어교육의 장소였다.(성인의 조카 김 막달레나의 증언) 1950년 6.25 사변 중에는 윤공희 신부, 장금구 신부, 최민순 신부와 이계항, 김창린, 김덕제 신학생 등이 피신하여 신앙과 고통을 나누었고, 휴전 후에는 서울의 많은 본당들의 주일학교 여름신앙학교 터였다.
나의 기억으로는 지금의 성당에서 구산으로 가는 우측 중간에 초가 공소(강당)가 있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 후 모두가 먹고 살기도 힘든 때에, 순교에 버금가는 신심으로 40여 가구가 힘을 모아 새 공소를 고딕식으로 아담하게 지었다(1956년). 지금도 노기남 대주교님께서 하사하신 (명동성당을 짓고 남은) 목재로 상량식을 거행하던 장면이 뇌리에 생생하다. 앞강의 깨끗한 모래와 돌을 날라 와 지극한 정성으로 지어서 그러한지, 철근 하나도 넣지 않았지만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금 하나 가지 않은, 아름답고 소박한 성전이다. 그러나 박해 중에도 소중히 간직했던 신앙의 중심이 세파에 밀려서는 어쩔 수 없이 철거를 당하고, 본당도 이전.신축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보금자리 주택지로 지정되면서 미사-강변지구 개발로 모든 것이 철거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허망하게 185년 동안 응축되었던 신앙의 중심이 허물어지고 말아야 하는가?! 똑똑한 세상의 경제 논리로는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러나 우리 신앙 순교자들의 전구를 들으신 하느님의 섭리는 세상의 생각과는 달랐다. 우리 교구장 주교님께서 똑똑한 세상 경제의 논리를 바보같은 순교신앙의 논리로 바꾸는 용단을 내리게 해 주시어, 신앙의 유산인 공소 건물이 통째로 이전.유지되게 하셨다.(이는 세상 이재에 밝은 공무원들의 실리 챙기기에 역행하는 처사여서, 법에 저촉되지나 않는지 눈치를 보아야 할 것 같다.) 35평정도 되는 성당 건물을 새롭게 짓는 비용이 더 싸게 먹힐 수 있으나, 비용이 더들어가더라도 선조들의 피땀이 배어든 신앙의 유산을 통째로 이전하려는 것이다.(용인대리구장 시절에 백암본당의 천막 성전을 신자들이 모두 힘을 모아 기둥파이프를 저마다 잡고 그대로 이전하는 것을 목격하였었다.) 구산 본당이 11번째로 장소를 옮겨 새 성전을 짓기 전에, 신앙의 유산을 우리 나름의 문화재로 여겨, 통째로 옮기는 것이다.(현대의 기술은 여기까지 발전하여 있단다.) 이는 대대로 이어져 오는 신앙유산을, ‘기억지킴이’를 위하여, 통째로 대물림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하늘에 계신 구산의 순교자 선조들이 이 모습을 굽어보시며, 대견해 하시고, 감탄하고 흐뭇해하시며, 모든 일이 서로 잘 작용하여 좋은 결과가 맺어지도록 전구하여 주실 것을 확신한다. 구산 성당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기도와 협력을 바라마지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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