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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재 성지 본당 주임 최민호 신부님,하느님의 종,순교자 황사영 진사 시복 대비차, 곡수리공소 사우거사기념서재 방문 (2018.08.02)-
마재 성지 본당 주임 최민호 신부님,하느님의 종,순교자 황사영 진사 시복 대비차, 곡수리공소 사우거사기념서재 방문 (2018.08.02)-

마재 성지 본당 주임 최민호 신부님, 하느님의 종,순교자 황사영 진사 시복 대비차,

곡수리공소 사우거사기념서재 방문 (2018.08.02)-                                                                                                 

마재 성지 본당 주임 최민호 신부님, 하느님의 종,순교자 황사영 진사 시복 대비차,

곡수리공소 사우거사기념서재 방문 (2018.08.02)--


                                                                                                 

마재 성지 본당 주임 최민호 신부님, 하느님의 종,순교자 황사영 진사 시복 대비차,

곡수리공소 사우거사기념서재 방문 (2018.08.02)--


     마재 성지 본당 주임 최민호 신부님이, 하느님의 종  순교자 황사영 진사 시복 대비차,곡수리공소 沙右居士紀念書齎로 변기영 몬시뇰  방문 (2018.08.02)-. 변기영 몬시뇰은 순교자 황사영 진사 묘  최초 발굴시 당시 가톨릭신문사 고국상 기자와 동국대 황용호 교수 등과 함께, 당시 주교회의 순교자시복시성추진위원회 총무 자격으로  황진사 묘를 확인차 발굴 경비를 전담하여 준비한 후, 현장 독막골 마을 이장을 비롯한 원주민 농민들 약간명과 함께 각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첫 발굴을  지휘하였다.

<사진은  며칠전(2018년 7월 11일)에 보내주신, 새 시성부장관 베츄 추기경의 고마운 답신을 함께 보며,,,>


10월 29일 월요일은 위대한 순교자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黃嗣永 進士)의 기념일입니다.

 
낮 12시에 천진암 성지 광암성당에서 기념미사가 봉헌되고, 미사후에는 간소한 다과도 있습니다.
황사영 진사1775~1801)는 1801년 辛酉年 迫害 때 북경 교구장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帛書)를 쓰고 체포된 후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서소문에서 가장 잔인한 사형방법인 능지처참(陵遲處斬)으로 온 몸이 머리와 양 다리와 양 팔을 각각 밧줄로 묶어, 각각 말 다섯 필에 매달고. 동시에 말을 사방으로 몰아서, 몸을 다섯으로 찢어 죽이는, 형벌을 받아 26세에 순교하였습니다.


황진사의 가족은 모두 왕명에 의하여 신분을 양반에서 종의 신분으로 떨어트려 어머니 全州李氏는 신분을 양반에서 종으로 낮추어, 거제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고, 황진사의 부인 정명연(丁命連) 마리아는 이벽성조의 외조카 딸이며 정약용 승지의 친 조카 딸인데, 신유년 박해 당시 28세로 제주도 모슬포 대정읍에 관노(官奴)로 유배되어, 남은 한 평생 38년간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838년에 그곳에서 선종하였습니다.


황진사의 어린 아들 황경헌(黃敬憲)은 1801년 당시 3세의 어린 아이로서, 역시 왕명에 의하여 신분이 양반에서 종으로 되어, 어머니 품에 안겨 함께 제주도로 유배가다가, 왕명을 따라, 배에서 추자도(楸子島) 부두가에 내려져서, 어부 오씨가 데려다가 길러서, 한 평생을 추자도에서 외롭고, 괴롭게 고아로 자라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선조들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는 얼마나 안전하고 풍요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반성하며, 우리도 순교정신으로 기념 미사에 참석하도록 합시다!
 
위대한 순교자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1775~1801)의 묘를 1980년 여름, 처음 발견하여 확인하였을때는 수풀에 우거진 상태였다. 당시 가톨릭신문사 고국상 기자의 수고로 황진사 종중 후손들, 특히 황용호 교수의 도움을 받으며, 천주교회에서 잊혀져 있던 묘 앞에서 가슴이 무거웠다(변기영 신부).


장흥(長興)면 부곡리 선영의 황사영(黃嗣永) 진사(進士) 묘를 발굴하였을 때, 십자가형으로 놓여진 돌덩이들과 작은 백자 항아리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는 황진사가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험에 급제하였을 때,정조 임금이 감탄하며 잡았다는 손목에 감고 다니던 비단으로 추정되는 다 삭은 천이 개켜져 썩어 있었다.


주문모 신부로부터 Alexi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던 황사영은 신부와 거처를 같이 하며 전교에 힘쓰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제천 산골 배론 토굴로 몸을 숨기고는 북경 주교 앞으로 보내는 백서(帛書)를 썼다. 그러나 밀사였던 황심(黃沁)이 도중에 잡히면서 황사영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약 한달 동안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서소문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능지처참형으로 처형되어 선영인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가마골(홍복산 밑) 기슭에 묻혔는데, 1980년 9월 1일 묘지 발굴 당시, 종친회 편에서는 창원황씨 17대손 황용호(黃龍浩, 동국대학교, 경상대)교수가 입회하였고, 천주교회 편에서는, 당시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 시복시성추진부장을 겸하던 주교회의 200주년위원회 사무국장 변기영 신부가 주관하였다.
 

황사영 묘 발굴 당시 발견된 항아리를 변기영 신부가 들어내고 있다. 곁에 있는 황두희씨는 판윤공파(判尹公派) 종친회 회장으로 황사영의 직계손이다. 신유박해 당시 황사영의 외아들 경헌이 추자도로 유배되자, 황씨 문중에서는 황사영의 사촌인 병직(秉直)을 양자로 들여 손(孫)을 잇게 했었다.(1980년 9월 1일)


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의 묘를 발굴후 재 손질한 모습(1980년 09월 20일)


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의 묘를 발굴하기 전 답사 확인(최초 답사 확인 1980년 7월 1일)

 최민호 신부는 의정부 교구 소속으로 마재 성지와 성지본당 주임을 겸하면서, 의정부교구의 성지들과 순교자시복시성 업무를 관여하며, 이미 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에서 교회역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시성부에서 주관하는 시복시성 행정에 관한 연수과정을 이수하고, diploma를 받았다. 


  최민호 신부는 본래 미리내본당 고초골 공소 구교우 가정을 외가댁으로 순교정신을 전승하는 집안 출신의 사제로서, 마재 성지 주변의 작은 군부대 병사들을 위하여 매주 예비신자 병사들도 10 여명씩 가르치며 입교 영세시키고 있다. 지금처럼, 우리 한국천주교회가 사회로부터 매력을 잃어서 대인 입교자가 적다기보다도, 기존 영세 신자들조차 적잖이 냉담하는 시기에, 큰 성지 마재 성지 사목도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은 터라, 교구와 본당의 경계를 초월하여, 전국 모든 교우들이 순교는 못할 망정, 순교자의 묘를 지키는데 관심과 정성을 필요로하고 있는 마재 성지  주임 최민호 마르코 신부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며 거들어주시기 바랍니다. -Msgr. Byon


Writer : 몬시뇰   Date : 2018-08-06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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